[문화투데이 황재연 기자] "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장례 준비 이야기를 터놓고 하기는 어렵더라고요. 할머니 모르게 일단 장례 방식은 화장으로 하기로 결정했어요."
경기도에 거주하는 A씨의 할머니는 아흔에 가까운 나이다.
A씨는 "할머니가 아직 정정하시지만 연세가 있다 보니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텐데, 연명치료나 장례 방식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하시지 않아 모른다"며 "우리나라는 아직도 죽음 준비에 대해서 쉬쉬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9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올해 초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9세 이상 성인의 54.3%는 '죽음이나 생애 말기 상황, 치료 계획에 대해 부모, 자녀, 배우자, 형제자매 등 가족에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반대로 '가족으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라는 물음에도 57.7%가 '없다'고 답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본인의 죽음에 대해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도 대화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보사연은 "고령화로 인해 2020년 우리나라 사망자 수가 처음으로 30만명을 돌파했고 2022년에는 37만명에 달했다"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할 사람들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은 증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응답자들은 죽음에 대한 대화를 꺼리면서도, 본인의 사망 전 과정에서의 통증이나 가족의 부담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요소(1∼3순위 선택)' 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죽을 때 신체적인 통증을 가급적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가족이 나의 병수발을 오랫동안 하지 않는 것', 세 번째는 '가족이 나의 간병 과정에서 경제적 부담을 많이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임종 시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는 응답은 최하위였다.
한편,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키워드를 조사한 결과 모든 연령대에서 '본인 의사 존중'이 가장 많이 나왔다.
또 응답자의 91.9%는 말기 및 임종기 환자가 됐을 때 연명의료 결정 제도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으며, 82.0%는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동의했다.
전문가들은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윤영호 서울대학교 가정의학과 교수는 "사회가 자연스럽게 죽음을 이야기할 기회와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며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한 사전돌봄계획(ACP)이 보편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ACP란 "건강할 때, 중증 질환을 진단받았을 때,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생애 말기의 순간에 걸쳐 의료기관에서 전문가 상담을 통해 3번의 돌봄 결정권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국가 차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환자의 존엄한 죽음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진 건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죽음은 노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인데, 이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아 죽음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며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주는 차원에서라도 생애 주기별로 죽음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도록 교육하고, 사망 전후 과정에서 가족과 본인의 뜻이 다르면 터놓고 상의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