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투데이 황재연 기자] 결혼 14년 차인 윤모(40)씨에게 명절은 그야말로 대이동의 연속이었다.
청주에 거주하는 윤씨는 명절이면 경기 수원의 큰집에서 차례를 지낸 뒤 충북 제천에 있는 시댁에 들러 성묘해야 했다.
이후 친정이 있는 청주 미원까지 매번 장장 350㎞를 오갔다.
고된 부분은 이동뿐만이 아니다.
큰집에 친척들이 모이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음식상을 차려야 했고, 설거짓거리는 산더미처럼 쌓여 늘 녹초가 됐다.
윤씨는 5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1년 치 설거지를 하루 만에 하는 기분이었다"며 "연휴 내내 강행군을 하다 보니 끝나는 날이면 온몸이 쑤셨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열흘에 달하는 이번 추석 연휴를 앞두고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가족의 제사 문화가 간소해졌고, 이제는 큰집만 차례를 지낸다.
윤씨를 포함한 나머지 식구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교통체증 속의 지루한 장거리 이동 없이 각자 가정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는 "큰집에서 다 같이 제사를 지내면 아무래도 식비 부담도 크고 잠자리도 불편했다"며 "코로나19 때 만나지 못해 차례를 간단히 지내다 보니 그게 익숙해져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상 은덕을 기리고 집안 큰 어르신을 중심으로 친인척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전통적인 추석 풍속이 변화하는 모습이다.
차례는 간소화되고 긴 연휴를 활용해 가까운 가족 또는 친구와 여행을 떠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명절이 개인의 삶을 소중히 하는 시간으로 바뀌는듯 하다.
롯데멤버스 자체 리서치 플랫폼 '라임'이 지난 8월 28∼29일 전국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답변의 비중은 64.8%로 작년 추석보다 16.4%포인트 높아졌다.
조사 대상 중 47.4%(중복응답)는 추석 연휴에 '여행을 떠난다'고 답했다.
국내 여행과 해외여행을 간다는 응답은 작년보다 각각 20.6%포인트, 10.5%포인트 높아졌다.
청주 개신동의 1인 가구 이모(32)씨는 "이번 추석이 길어 하루 정도 시간을 내 친구 3명과 국내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라며 "어른들과 오래 있으면 결혼 잔소리를 피할 수 없는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미래에 대해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계획을 전했다.
가족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당연시되던 풍습이 옅어지면서 '명절 증후군'도 점차 옛말이 되는 모양새다.
2009년 결혼한 이모(43)씨는 "예전에는 제사를 지냈지만, 워킹맘이라는 것을 시댁 식구들이 이해해주고 시어머니도 과거 며느리로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성묘로 대신하기로 했다"며 "명절만 다가오면 음식 준비가 큰 부담이었는데 이제 그런 짐이 조금 덜어진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청주의 한 정신과 의사는 "과거에는 명절을 앞두고 두통이나 소화불량 같은 명절 증후군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꽤 있었는데 요즘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며 "오히려 시어머니가 아들과 며느리 눈치를 본다면서 상담받으러 오는 경우도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변화를 시대적 흐름으로 해석한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수도권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면서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이 늘었다"며 "또 유교 문화 핵심이던 대가족 형태가 핵가족, 1인 가구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가족 간 유대감이 약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모에 대한 예보다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문화가 젊은 세대에 자리 잡으면서 명절 풍습이 달라지고 있다"며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한국 사회는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