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의 싱크탱크 경제평화연구소(IEP)는 매년 여러 안전 지표를 계량화한 '세계평화지수 보고서'를 통해 세계 160여개국의 안전 순위를 발표한다. 아이슬란드가 늘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나라로 뽑히는데 한국은 40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북 분단 상황이 크게 반영된 순위로 생각되는데 우리 국민이 느끼는 안전 체감도에 비해 순위가 그리 높진 않다.
생산 현장의 안전 순위는 상대적으로 더 낮다.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타 회원국의 평균 수준이지만 산업재해 사망률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자 1만명당 산재 사망사고자 수를 뜻하는 사망사고 만인율이 0.43명(2021년 기준)으로 OECD 38개국 중 34위다. OECD 평균 0.29명에 훨씬 못 미친다. 사망사고 만인율이 지난해 0.386명까지 내려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높다.
19일 또 한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날 경기 시흥 SPC삼립 공장에서 새벽 작업을 하던 50대 여성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이는 사고로 숨졌다.
SPC 계열 공장의 산업재해는 "또 거기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잦다. 최근 3년간 노동자 3명이 숨지고 5명이 다쳤다. 사고가 날 때마다 회사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사고는 계속됐다. 구조적인 안전 문제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022년 10월 경기 평택 SPL 제빵공장에서 23세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사망했을 때 SPC그룹 차원에서 허영인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안전관리 강화는 물론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의 문화를 정착시켜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면서 1천억원을 안전관리 강화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년도 채 안 된 2023년 8월 경기 성남 샤니 제빵공장에서 50대 노동자가 또다시 끼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도 회사는 "고인과 유가족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사건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겠다"고 사과했다.
이번에도 사과는 빨랐다. 사고 당일 김범수 SPC삼립 대표이사 명의로 "관계 당국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정확한 사고 원인 파악과 후속 조치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이 곧바로 발표됐다.
공염불이 돼온 사과를 믿을 수 있을까. 관계 당국의 엄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동안 SPC 계열사 산재와 관련된 수사와 처벌은 더뎠다.
2022년 10월 사고와 관련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불구속기소 된 전 SPL 대표가 올해 1월에서야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23년 샤니 공장 사고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수사가 진행 중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이 2022년 1월 시행된 이래 그해 644명(산업재해 조사 대상사고 사망자 기준), 2023년 598명, 2024년 589명으로 사망자가 소폭 감소세지만 여전히 연간 약 600명이 일터에서 온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일을 줄이기 위해선 처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처벌을 강화해서라도 소중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어떤 이유로든 이윤이 안전보다 앞설 순 없다.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은 끝내 성공하기 어렵다.
SPC가 이번에도 공염불 사과에 그치는지 소비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다시 불매운동이라도 벌일 태세다. 뼈아픈 자성을 거듭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