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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유명사찰 탐방]⑦ 영천 임고면 길상사와 임고서원

보검스님 (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 대표)

포은 정몽주 선생 <능엄경> <법화경> 공부 인연 살려....길상사 프로그램 운영 계획

우리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유학인 성리학만을 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포은 선생은 불교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포은 선생은 영천시 임고면 출신이다.

 

포은 선생의 충절을 기려서 임고면 양항리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세웠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明宗) 8년(155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 등이 지역 유지들과 사람들을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고,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포은 선생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부인은 아들인 정몽주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 예상, '백로가'(白鷺歌)라는 시 한수를 지어 아들 정몽주에게 교계하게 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어머니의 예견대로 포은 선생은 이색의 문하에서 조선조 이성계의 개국공신들인 조준, 남은, 정도전 등과 함께 배웠다.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 말 충신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도전과는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도전과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 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으로 돌변했으며, 달가(達可, 정몽주의 별호)가 《능엄경》을 읽는다면서 편지를 보내서 비꼬기도 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은 고려 말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불교세력의 극심한 불교의 폐단을 목격하였고, 새로운 사회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져 불교가 가라앉고 성리학이 전래되어 신진사상으로 떠오를 때 <심문천답>, <심기리편>, <불씨잡변> 등 불교를 비판하는 책을 써서 불교를 비판했다. 정도전은 책을 집필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 일당에게 개성 선죽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성계가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이방원은 다음과 같이 《하여가》를 읊었다.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응수하였다.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는 고려 조정에 충절의 뜻을 표했다. 
 
 포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결국에는 부하들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숨이 막히는 조선 개국 초의 비극적인 역사의 한 줄거리이다. 
 

 

명종 10년인 1555년 포은 선생을 기리는 임고서원이 고향인 경북 영천에 창건되고,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임고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임고면 선원리에 최근 불교 사찰인 길상사가 개원됐다. 주지 도오 스님은 “이곳 길상사는 법화도량으로 법화경 사경 도량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임고서원이 지척에 있고 포은 선생은 성리학 뿐 아리라, 불교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는데, 특히 《능엄경》과 《법화경》을 읽고 불교에 심취했던 인연을 상기하여 길상사와 임고서원을 연계한 프로그램을 개발, 불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힐링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