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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보검스님의 文化탐방] 담양 소쇄원 민간 원림(園林)을 찾아서

보검스님

[문화탐방]

담양 소쇄원 민간 원림(園林)을 찾아서 

 

삼천리금수강산 곳곳에 명승지가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이름난 문화 유적지가 너무나 많은 곳이 대한민국이다. 신라 고려 때는 불교문화가, 조선 시대에는 유교문화가 꽃피웠던 것이다.

 

얼마 전 담양 가는 길에 소쇄원 원림을 방문했다.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소새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 원림이다. 우리나라 민간원림의 원형을 간직한 소새원은 명승 40호로 지정된 곳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구도적 삶과 지조를 생명으로 여겨 선비정신을 올곧이 지키면서 만남과 교류의 장소로 역할을 했던 소쇄원은 지금은 문화유산의 보배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소쇄원(瀟灑園)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조성한 일종의 산림 정원이다.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였다. 스승이 화를 당하자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세속적 권력과 영화를 뒤로 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만든 별서정원이다. 경서나 읽고 시나 지으면서 풍류만을 즐긴 양반가의 별장이 아니라, 소쇄원은 농사를 지으면서 농장 옆 미니 계곡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은 별장이었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인데, 동시대의 면앙정 송순(宋純, 1493년∼1583년)이 양산보에게 지어 준 호(號)임이 최근 밝혀졌다고 한다. 송순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문하에는 김인후·임형수·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임제 등과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 들이 있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소쇄원은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할을 하였다.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담양은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유서 깊은 고을이다. 담양하면 대나무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선비의 고향이면서 유학을 숭상하여 발전시킨 성리학의 고을이기도 하다. 소쇄원은 1983년 7월 20일에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에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양산보의 후손으로 종손인 양재혁 원장은 소쇄원을 본래의 별서정원으로 유지 계승하기 위하여 미니 농사와 자연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발전시키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소쇄원의 자연 계곡 물을 상수도로 활용한다는 목적으로 계곡물이 줄어든 바람에 소쇄원 본래의 운치에 손상을 입고 있다고 했다.   

 

 

 소쇄원 내원(內園)의 면적은 1400여 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 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 곳곳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소쇄원의 실제 평수는 외원(外園)까지 포함하면 수 만평에 이르고 뒤편에는 산을 끼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유재란 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월당은 정사(精舍)의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양산보의 곧은 뜻을 알게 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는 종손 양재혁 원장이 백방으로 뛰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양산보를 흔히 산림처사(山林處士)라 하는데, 과거에는 합격했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소쇄원에서 은거, 은둔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양산보는 “나의 아들과 손자가 현명하여 그 당(堂)을 얽어 세운 뜻을 이해한다면, 나의 혼백이 영원히 간 뒤에도 거의 수백 년 동안을 보전하여 지킬 것이니 너희들은 힘쓸 것이다. 따라서 당의 벽 사이에 써서 자손에게 전해 보인다.”라고 한 사실에서 양산보의 자연관이나 정원관을 살펴볼 수 있다. 
 

 

자연 속에 묻혀 혼연일체의 삶을 살고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도교적인 삶보다는 자연을 구획지어 자신만의 세계인 정원을 만들고 살기를 원했으며,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일종의 인공경관인 정원을 다시 자연 속으로 돌려보내기 보다는 후손이 계속 가꾸고 소유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상당히 현세적이고 어떻게 보면 서구적인 자연관을 가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담장으로 공간을 구획지어 경계를 이루고 축대를 쌓아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여 정원을 살찌게 하였으며 사람이 사는 공간을 만들어 지내는데 편리하게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그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남과 달랐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