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투데이 장은영 기자] "475년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1천550년 전 백제와 고구려가 맞붙었다.
그에 앞서 왕위에 오른 개로왕(재위 455∼475)은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등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백제는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자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보냈고, 고구려를 '승냥이와 이리'에 빗대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며칠 만에 백제의 북성과 남성이 잇달아 함락됐다. 백제가 한성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터,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게 된 역사적 순간이다.
한반도를 뒤흔든 475년 한성 전투가 박물관에서 펼쳐진다. 이달 16일부터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선보이는 특별전 '한성, 475 - 두 왕의 승부수'를 통해서다.
박물관 관계자는 "백제와 고구려 간 갈등의 역사를 배경으로 (고구려) 장수왕에 당당히 맞선 개로왕의 노력과 한계를 조명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백제와 고구려 시대에 제작된 무기, 갑옷을 포함한 유물 450건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는 4∼5세기 백제의 상황을 짚으며 시작된다.
369년 백제와 고구려가 옛 대방 지역(지금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쟁을 벌인 이후 대외 정세와 백제 왕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고군분투한 흔적을 쫓는다.
공주 수촌리와 서산 부장리, 화성 사창리에서 출토된 금동 관모,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 경관을 표현한 블록 모형 등이 소개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무기와 전술을 다룬 부분은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1925년 11월 당시 경기 광주군 선리(현재 하남시) 일대에서 발견된 쇠뇌의 방아쇠 틀 '노기'(弩機) 조각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된다.
쇠뇌(弩)는 방아쇠를 당겨 활을 발사하는 기계식 활을 뜻한다. 사람이 쏘는 활보다 화살을 더 멀리 보낼 수 있고 위력도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관람객들은 영상을 통해 쇠뇌 원형과 작동 원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최근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는 경기 연천 무등리 보루(堡壘·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든 방어 시설)에서 출토된 고구려 장수의 갑옷과 함께 전시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명훈 학예연구사는 "백제에서 드문 온전한 철제 갑옷과 투구"라며 "7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나 형태와 구조적으로 5세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성벽을 오르거나 산에서 이동할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쇠못 신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갑옷과 무기를 고증해 만든 재현품을 함께 소개하며, 화살을 쏘는 실험 영상과 전문가 인터뷰 영상을 더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웅진에서 중흥의 기틀을 다지려 한 백제의 노력도 비중있게 다룬다.
한성 함락 46년 만인 521년 무령왕(재위 501∼523)이 다시 강국이 되었노라고 선언한 '갱위강국'(更爲强國)의 의미는 용·봉황장식 고리자루 큰칼, 무령왕 그림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존의 고고학 전시와 달리 한 편의 '전쟁 영화'처럼 꾸민 연출이 돋보인다.
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40분 분량의 단편 영화를 특별히 만들었다. 이달 말 유튜브 공개에 앞서 전시에서는 일부를 소개할 예정이다.
영상은 당시 복식과 전술, 지형을 고증해 백제와 고구려군의 치열한 전투를 그려낸다.
웹툰 '칼부림'의 고일권 작가가 그린 다양한 삽화, 프로 바둑 기사이자 유튜버로 활동 중인 조연우 2단이 만든 기보 등도 흥미롭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장은 "475년 한성 전투가 단순히 백제의 패전이 아니라, 웅진 천도의 원인이자 삼국 각축의 분기점이 된 중대 사건이라는 점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