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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붓끝에 삶을 새기다…신흥암 진경스님의 ‘인생 서예’

천진보탑 품은 산사에서 만난 묵향…인연·사랑·삶의 무상함을 붓으로 전하다

 

[문화투데이 황재연 기자] 한 장의 화선지 위로 거침없는 먹빛이 흐른다.

 

때로는 힘차고 때로는 유연하다. 굵고 가는 획이 자유롭게 이어지고, 글씨 사이의 여백에서는 산사의 고요함마저 느껴진다.

 

천진보탑이 있는 신흥암 진경스님이 직접 쓴 서예 작품이다.​

 

진경스님의 작품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글씨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과 인연, 사랑과 이별,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한 획 한 획에 스며 있다.

 

“살아서는 은혜가 깊다 말하지만…”

 

첫 번째 작품에 담긴 구절은 인간의 정과 마음의 변화를 돌아보게 한다.

 

 

생전개개설은심이나 사후인인각선분이라

 

(生前个个說恩深이나 死後人人却扇墳이라)

 

살아 있을 때는 사람마다 은혜와 정이 깊다고 말하지만, 죽은 뒤에는 사람의 마음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어지는 구절은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화호화피난화골이요 지인지면부지심

 

(畵虎畵皮難畵骨이요 知人知面不知心)

 

호랑이를 그릴 때 그 가죽은 그릴 수 있어도 뼈까지 그리기는 어렵고, 사람의 얼굴은 알 수 있어도 그 마음까지 알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사람은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만으로 사람의 진심과 본성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오래된 삶의 지혜다.

 

특히 ‘지인지면부지심(知人知面不知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진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한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혹시 겉모습만으로 누군가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경스님의 붓글씨는 그 질문을 말없이 던진다.

 

악연과 사랑도 결국 내려놓아야 할 인연

 

두 번째 작품에서는 인간관계의 얽힘과 사랑, 집착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만날 수 있다.

 

 

불시원가불취두라 원가상취기시휴냐

 

(不是怨家不聚頭라 怨家相聚幾時休냐)

 

원수가 아니면 서로 만나 얽히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얽힌 인연은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라는 뜻으로 읽힌다.

 

살다 보면 좋은 인연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기도 하고, 가까웠기 때문에 더 깊은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피하고 싶은 사람과 다시 만나기도 하고, 끊으려 해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 관계도 있다.

 

그래서 인연은 때로 축복이면서 동시에 삶의 숙제가 된다.

 

이어지는 글귀는 더욱 묵직하다.

 

조지사후무정의런들 각장생전은애구

 

(早知死後無情義런들 却將生前恩愛鉤)

 

죽은 뒤에는 정과 의리도 결국 내려놓게 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어찌 살아생전 사랑과 애정이라는 갈고리에 그토록 얽매였겠느냐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 사랑과 인연에 지나치게 집착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는 삶의 경계에 가깝다.

 

한 획 한 획이 곧 수행

 

서예와 수행은 닮은 점이 많다.

 

먹을 갈고 붓을 들기 전에는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붓끝도 흔들린다.

 

그리고 한 번 그어진 획은 되돌릴 수 없다.

 

우리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지나간 어제를 다시 살 수 없고, 한번 내뱉은 말과 행동을 완전히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진경스님의 글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단순히 ‘잘 쓴 서예’를 감상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글씨를 읽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읽게 된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붓의 흐름에는 세월을 살아오며 마주한 인연과 이별, 사랑과 미움, 집착과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허무를 말하지만 결국 ‘오늘’을 이야기한다

 

진경스님의 작품에 담긴 문장들은 언뜻 보면 인간관계의 허무함과 삶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반대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영원한 것이 없기에 지금이 소중하고, 헤어짐이 있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귀하다는 것이다.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살아 있을 때 고맙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할 수 있을 때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미움이 있다면 너무 오래 가슴에 품지 않고, 풀 수 있는 오해가 있다면 늦기 전에 풀어야 한다.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알 수 없다면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도 지혜다.

 

결국 삶의 무상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세상을 허무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연을 더욱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천진보탑 아래, 붓글씨가 던지는 질문

 

천진보탑이 자리한 신흥암.

 

고요한 산사의 한편에서 진경스님이 붓으로 써 내려간 글은 화려한 수식 없이도 오래 눈길을 붙잡는다.

 

먹은 마르고 붓은 종이를 떠났지만 글씨가 전하는 메시지는 남는다.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있어도 마음까지 볼 수 없는 세상.

 

사랑과 미움도, 만남과 이별도 결국 지나가는 인연이라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 점의 서예 작품 앞에서 그 질문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다.

 

어쩌면 진경스님의 붓끝이 말하고 싶은 것은 거창한 삶의 철학이 아닐지도 모른다.

 

곁에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며, 미움과 집착은 조금씩 내려놓고 살아가라는 것.

 

천진보탑을 품은 신흥암에서 만난 묵향은 그렇게 삶의 한 페이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